서른한번째 窓
''팩트와 맥락"
“지난 금요일 서울 모 호텔에서 A기업 임원 김씨가 경쟁업체인 C기업의 임원 이씨와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눴다.” 살다보면 ‘사람 잡는 오해’라는 걸 가끔 겪기도 합니다. 아마 이런 경우가 해당될 겁니다. 만약 앞의 광경을 A기업이나 C기업의 직원들, 아니면 이들을 아는 언론사 기자라도 우연히 목격했다면 아주 난처한 처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정보유출을 하나? 스카우트 제의인가? 아니면 가격 담합?” 그럼에도 이 문장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여기선 그냥 김씨와 이씨가 무조건 “나쁜 놈!”이면 됩니다. ‘팩트’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날 만난 김씨와 이씨가 어릴 적 친구사이였고 여러 가지 이유로 연락이 끊겼다가 실로 오랜만에 우연찮게 만나 밥 한 끼 먹게 된 거라면 어떻습니까. 그 식사장면이 문제될 건 별로 없어 보입니다.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상황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 삶에서 팩트와 맥락은 무척 중요합니다. 각각도 중요하긴 하지만 둘이 딱 붙어 떨어질 수 없는 밀착관계라는 게 더 중요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케미’가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맥락은 제쳐두고 팩트로만 세상일을 판단하는 잘못을 밥 먹듯이 한다는 게 문제인 겁니다.
비단 ‘호텔의 그들’처럼 개인적인 비즈니스로 끝나지도 않습니다. 정치든 경제든 근거가 애매한 이슈가 툭 불거지기도 하는데요. 간혹 언론이 하는 실수가 이렇게 만들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나는 던져놓을 테니 판단은 그대들이 알아서 하시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슈 한 줄만 봐선 어떤 배경에서 그런 내용이 나왔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 그 팩트를 두고 온갖 추측에, 아전인수식 해석이 난무할 수밖에요. 그래서 최근 언론에서 히트상품이 된 ‘팩트체크’란 코너가 관심을 끄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참 씁쓸할 일이 아닙니까. 팩트에 달린 맥락을 풀어주는 건 당연히 일인데 이것이 마치 심층취재처럼 떠오르고 있으니까요.
맥락이 없는 팩트는 없는 법입니다. 팩트만 보고 판단해버리면 아주 곤욕스러운 상황을 만들 수도 있는데요. 멀쩡한 사람을 살인자로 둔갑시킬 수도 있고요, 파렴치한으로 몰고 갈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본 ‘김씨와 이씨’의 경우처럼요. 게다가 말이지요. 만약 김씨와 이씨가 남녀 사이였다면 어땠을까요. ‘나쁜 놈’ 정도로 그치지 않을 겁니다. 아마 소설책 한 권은 나오지 않았을까요. 물론 팩트만 보고 내린 판단이 ‘진짜 사실’일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주사위를 던져 항상 1번만 나오길 바라는 ‘헛된 꿈’인 거지요.
그러니 팩트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면 아예 판단을 하지 말자는 게 내 의견입니다. 어설픈 판단은 안 하느니만 못하니까요. 판단을 못하는 상태에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각자의 ‘취향에 맞춘 해석’밖에 안 되는 겁니다. 또 어설픈 판단이 세상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고요.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터지고, 서로 못 미더워 하다가 모두를 지치고 힘들게 할 겁니다.
맥락이 별것인가요.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팩트의 전후 사정이 맥락입니다. 그러니 그 전후 사정 한번 알아보자는 겁니다. 앞에는 어떤 원인이 있었고, 뒤에는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됐는지를 살펴보자는 겁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말이지요. 적어도 팩트에 눈이 멀어 상황을 잘못 받아들이거나 엉뚱한 싸움거리를 만드는 일은 많이 사라질 겁니다.
자, 이젠 달랑 팩트 하나로 일의 전부를 판단하는 실수가 좀 줄어들까요. 결국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쓸데없이 아는 척 해 문제를 만들지 말라는 얘기이기도 한데요. 좀더 친절하게 풀어주면 이런 뜻입니다.
“팩트로 멀쩡한 사람 잡지 말고, 맥락을 보고 판단하세요. 모르면 차라리 ‘판단정지!’가 낫습니다. 그 편이 우리 인생이나 사회에 훨씬 도움이 될 거고요.”
어떻습니까. 주위에 이런 충고 한 번씩 날려주고 싶은 사람이 한둘은 꼭 있지 않습니까. 물론 나 자신을 먼저 알아야겠지요. 정말 나는 맥락을 잘 살피고 있는지, ‘팩트체크’부터 하는 게 순서이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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