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블로그에 해당하는글 327

스물한번째 窓

 

"일과 친해지는 방법"

 

 퀴즈 하나 풀고 갑시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숙명적 관계. 그럼에도 늘 좋아할 수도 늘 싫어할 수도 없는 애증이 절절 끓는 사이. 있으면 귀찮지만 없으면 구차해지며, 많으면 도망가고 싶고 사라지면 기어이 찾아나서야 하는 것. 짐작이 됩니까. 바로입니다.

 

일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요. 넘쳐나도 큰일이다 싶지만 없어지는 건 더 큰일이고요, 사람을 풍요롭게도 만들기도 비참하게도 만들기도 합니다. 순직이란 말이 나올 만큼 우리 삶에 절대적이기도 하고요, “일이야? 나야? 둘 중 하나 선택해!”란 상황이 만들어질 만큼 적대적이기도 합니다. 아마 먹고사는 문제가 결부돼 있기 때문일 겁니다. 없으면 당장 위기의식이 생기는 거지요. 사실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일이 없으면 인생이 초라해지고 답답해지기도 합니다.

 

물론 일의 또다른 종류로 취미나 봉사활동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의 두 번째 역할일 뿐이지요. 일의 첫 번째 역할인 먹고사는 문제를 취미나 봉사활동으로 해결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회사에서 하는 일취미나 봉사활동으로 하는 일의 느낌이 다른 걸까요. 어째서 취미나 봉사활동을 할 때 느끼는 희열이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보다 더 센 걸까요.

 

한겨울에 산동네에서 연탄 나르기를 하거나 세계 오지를 찾아가 아이들을 돌보는 등, 종교단체를 통해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자원봉사란 이름으로 하는 온갖 허드렛일은 아주 즐겁고 보람이 된다고들 합니다. 그뿐인가요. 산을 타고 벽에 오르고 파도를 타고 하늘을 나는격한취미생활에도 적극적입니다. 아마 회사에서 시켰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들이겠지요

 

물론 취미나 봉사활동이 자신들의 생업보다 결코 약하다고 할 순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차이가 나는 건 먹고사는 일과 취미·봉사활동을 하는 감정 사이에 뭔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아마 과학적이고 심리적인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여러 분석을 내놓고 야무지게 한마디씩 보태기도 했을 텐데요.

 

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시각은 좀 다릅니다. ‘일과 얼마나 친한가의 차이 때문이란 겁니다. 취미나 봉사활동과는 달리,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과는 별로 친하지 못해서란 거지요. 결국 마음이 움직이는 행위와 의무·책임이 움직이는 행위의 차이일 겁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먹고사는 일을 힘들게만 해야 하는 걸까요. 험하디 험하다는 3D 직종처럼 일 자체가 버겁고 어려운 거야 어쩔 수 없다고 해두지요.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일을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먼저 일이 왜 어렵고 힘든지부터 따져봐야 할 겁니다. 보통은 내가 한 만큼 일의 성과가 잘나오지 않을 때 힘들어집니다. 심혈을 기울여 상품도 만들고 마케팅전략도 짰는데 시장에서 반응이 영 시원치 않을 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뿐일까요. 어떤 일을 시작할 때결과가 안 좋을 거다라고 미리 단정하는 경우는 없을까요. 내가 볼 땐할 만하다는 긍정적인 신호보다죽을 맛이다란 부정적인 신호가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일도 마음의 영역이란 얘기지요. 해결책은 역시 일과 친해지는 겁니다. 일과 친해지려면 일을 덜 힘들게 하는 게 좋고요, 일을 덜 힘들게 하려면 결과를 빨리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결과물에 대한 피드백 역시 짧을수록 좋습니다. 피드백이 짧아야 수정도 빨라질 테니까요. 오래 붙들고 있어 봤자 진만 뺄 뿐이란 뜻입니다. 권투선수가 그렇다고 하지 않나요. 휘두르는 주먹에 상대가 맞지 않고 헛스윙이 될 때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지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 말은 우리가 하는 일에 바로 적용됩니다. 평생 함께할 일과의 동거가 불가피하다면 그 일과 친하게 지내는 법을 찾는 것이 현명합니다. 타깃을 짧게 잡고, 결과를 빨리 보고, 그 결과에 주눅 들지 말 것. 오늘의 결과가 절대로 내 인생 전체를 다 지배하지는 않습니다.

 

 

 

COMMENT : 0 TRACKBACK : 0

카테고리

곽재선의 窓

날짜

2018.11.06 11:41

스무번째 窓

 

"목표를 상실했을때가 슬럼프다"

 

 운동선수가 늘 염려하는 것이 두 가지랍니다. 하나는 부상, 다른 하나는 슬럼프. 연습이나 경기 중에 당하는 부상이야 다 아는 내용일 거고요, 한동안 연습효과도 올라가지 않고 의욕도 떨어져 성적이 추락하는 시기를 슬럼프라 한다지요.

 

스포츠에서 가장 많이 쓴다지만 슬럼프란 말은 우리가 일상용어처럼 사용하기도 합니다. “슬럼프라 일이 안 된다” “슬럼프에 빠져 술이 늘었다처럼요. 잘 나가던 사람이 그 자리에서 맴맴 돌거나 영 부진한 상태가 돼버리는 걸 말하지요. 마치 버퍼링에 걸린 동영상처럼 말이지요.

 

참여정부 때의 일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 후 딱 3개월 만에 공식석상에서 한 발언이 있습니다. “대통령 못해먹겠다!” 이 말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수진영에게 좋은 빌미가 되고 있나 봅니다. 막말논란 혹은 무능한 대통령 등을 들먹일 때 어김없이 등장하니까요. 하지만 나는 그 상황을 달리 읽었습니다. ‘대통령직의 슬럼프였다고 말이지요. 사업가도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나 더 이상 사업 못해먹겠어라고요. 직장인이라면회사 다니기 싫어가 되겠지요.

 

살면서 우린 심심찮게 슬럼프를 말합니다. 이유도 다양합니다. 몸이 아프다,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 실직했다, 실연했다 등등. 틀린 말은 아닙니다. 뭔가 추구하는 바와 원하는 바가 없어질 때 느끼는 상실감, 그것을 슬럼프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슬럼프는 뭔가목표를 잃어버릴 때찾아오더란 겁니다. 올인하던 대상이 사라졌을 때, 겨누던 과녁이 치워졌을 때 상실감에 빠져 의욕을 잃고 그냥 술타령만 하고 있더란 겁니다.

 

흔히 젊은 친구들에게네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가히빛의 속도로 내놓는 대답들이 있습니다. “부장으로 승진하는 겁니다.” “매출 200% 성장” “창업 해야지요” “연봉 인상!” 이런 것도 있지요. “올해는 꼭 집을 장만하렵니다.” “단연 결혼입니다.” “로또 당첨이요.” 다 좋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요. 분명히 목표를 말하라고 했는데 다들 소원을 빌고 있으니까요.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목표라는 게 무엇을 가지는 건 아니란 겁니다. 진정한 목표는 뭘 얻는 게 아니라무엇을 해야겠다’ ‘무엇을 하고 싶다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명품백, 잘빠진 자동차가 목표일 수는 없는 거지요.

 

예컨대 매일 30분씩 운동을 하겠다, 이것은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 누구에게든 좋은 말을 해주겠다, 이것도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장이 돼야겠다, 이것은 목표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사장이 돼서 무엇을 해야겠다까지 나와줘야 비로소 목표가 되는 겁니다. 사장이 되는 걸로 끝나선 안 된다는 얘기지요.

 

우리나라에 국회의원이 300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의원이 돼서 무엇을 하고 싶다기보단 그저 의원이 되고 싶었던 경우가 대부분인 듯합니다. 지금껏 욕먹는 정치판을 이어가고 있으니 말이지요. 아마 목표를 거기서 끝나버려서가 아닐까요.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겠지요. 초심으론 무엇을 하겠다는 다짐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각오가 점점 옅어지고 매너리즘에 빠지고. 바로 그것이 슬럼프인 겁니다. 더 이상 어떤 걸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 그때 들이닥치는 것.

 

만약 무엇을 가지는 것이 목표라면, 그것을 얻은 사람은 슬럼프라는 게 없어야 합니다. 최고의 배우, 대통령, 국회의원에게는 슬럼프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요. 그들도 슬럼프를 겪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정이 이렇다면 슬럼프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봐야겠지요. 두 가지만 얘기해볼까요. 하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을 끊임없이 찾는 것입니다. 작은 목표를 꾸준히 마련하란 소리입니다. 오늘이 모여 내일이 되고 한 주가 되고 한 해가 되고 평생이 될 수 있도록. 뭘 해야겠다, 뭘 봐야겠다는 자극이 계속 있다면 당장 힘든 일쯤은 잠시 잊을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른 하나는걱정고민을 구분하는 겁니다. 가령 어깨가 축 쳐져 있는 직원이 불려 와서매출을 어떻게 올릴까 고민 중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칩시다. 그것이 정말 고민일까요. 내가 장담컨대 그건 걱정입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우리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을 때는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어떻게 할까를 궁리하는 게 대부분이니까요. 게다가 고민은 잠시 멈출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은 다릅니다. 걱정하고 있을 땐 힘들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옵니다. 멈출 수도 없고 조절도 불가능하지요.

 

사실 슬럼프가 있다, 없다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슬럼프는 자신의 상태를 재는 잣대에 불과하니까요. 결국 슬럼프에 빠져 있다는 건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고요, 행복하지 않다는 건 지금 하고 싶은 목표를 잃어버렸다는 뜻인 겁니다.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뭐 간단합니다. 슬럼프에서 빠져나오면 됩니다. 소소한 목표를 만들면 됩니다. ‘당장 하고 싶은 것을 찾아즐겁게 고민하면 됩니다. 하다못해오늘은 칼퇴근해 영화 한 편을 봐야지같은 것이라도요. 이른 퇴근 후 어떤 영화를 볼지 즐겁게 고민하는 건 참 행복한 일이지 않습니까.

 

 

 

COMMENT : 0 TRACKBACK : 0

카테고리

곽재선의 窓

날짜

2018.11.06 11:39

열아홉번째 窓

 

"모르는 자와 잊은 자"

 

 10여 년 전 일입니다. 우리 가족사 KG케미칼에서 큰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는 한밤중 벙커씨유를 탱크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어났지요. 담당 직원이 밸브를 열어놓고 잠그는 것을 잊은 겁니다. 벙커씨유는 탱크를 채우고 넘쳐 근처 안양천까지 흘러들고야 말았습니다. 대형사고였습니다.

 

결국 사고는 회사에 큰 상처를 남기고 우여곡절 끝에 해결을 봤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그 직원을 문책하는 것 외에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물론 실수였지요. 직원이 일부러 밸브를 잠그지 않은 건 아니니까요. 잠가야 하는 걸 알면서도 놓친 거니까요. 그렇다면 잘못에 대한 책임을 어느 정도 덜어내도 되는 걸까요.

 

이렇게 한 개인의 실수가 몰고 온 엄청난 파장을 보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몰라서 저지른 잘못이 큰가, 알면서 저지른 잘못이 큰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수니까 좀 봐줘도 되지 않느냐고 할 겁니다. 하지만 내 의견은 좀 다릅니다. “몰라서 한 잘못보다 알면서 한 잘못이 더 크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몰라서 못하는 건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알고 있지만 소홀히 해서, 깜박 잊어서, 귀찮다고 내팽개쳐서, 그냥 실수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겁니다.

 

회사 일이 뭔가 잘못 됐다면 몰라서 못한 것보다는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안 한 탓이 더 큽니다. ‘이렇게 하자혹은이렇게 해야 해로 정한 것을 그냥 대충 넘겨서, 간과해서 벌어지는 일인 거지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몰라서 안하는 것보다는 잊어버리고 안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사람관계가 어디 그리 간단하냐고요? 아니지요. 자신의 입장에서 편한 대로 생각해버린다면 그건 해야 할 일을 잊은 겁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란내로남불식으로 해석해 버린 겁니다. 해야 할 일을 안 한 것을 나는잊었다고 표현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한다는 정도는 누구나 압니다. 운전을 할 때 신호를 지켜야 한다는 것도 알지요.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도, 약한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도,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도, 폭력은 나쁘다는 것도 다 압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실천을 안 하는 거지요. 뭐 대단한 핑계거리가 있지도 않을 겁니다. 그저 바쁘고, 귀찮고, 피곤하고 등등이 주된 이유겠지요.

이런 얘기도 해볼 수 있을 겁니다. “역사를 왜 공부하는가.” 아마 역사수업 첫 시간이라면 으레 한 번쯤 토론해본 주제지요. 아주 묵직해 보이지만 내가 볼 땐 이것 역시 간단한 문제입니다. ‘이런 일을 저지르면 저런 결과가 나오니 지난 과오를,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는 다짐이니까요. 그런데 이 문제를 그냥 빨리 잊자는 걸로 대신해버리기 때문에 계속 똑같은 사안이 반복되고, 꼬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공부는 왜 할까요. 물론모르는 것을 알자는 게 가장 큰 목적일 겁니다. 하지만아는 것을 잘 지키자는 것도 무시해선 안 되는 중요한 목적이 아닐까요. 우리는 모르는 걸 알아가는 데는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부으면서 아는 것을 지키는 데는 참 소홀합니다. 그러니더 배우려고 하지 말고 알고 있는 것이라도 잊지 마라!’ 이것이 내 공부철학입니다. 모르는 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구글에게 물어보고 차라리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나 상식을 실천하는 공부를 하자는 겁니다.

 

회사에서 사고 친 직원이 상사에게 꾸중을 들을 때 늘 하는 말이 있지요.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과연 그가 몰랐을까요. 내가 볼 땐 알면서도 안했을 확률이 훨씬 큽니다. 조직에서 반드시 지켜내야 할 것을 지키지 않아서 생긴 문제라고 봐야 할 테니까요. 그 직원은모르는 자가 아닌잊은 자인 겁니다.

 

때늦은 후회는모르는 자보다잊은 자의 몫이 더 큽니다.

 

다만 면피용 예외 한 가지는 남겨두기로 하지요. 물리적으로 정말 기억이 나질 않게 됐을 때, 가령 기억상실증, 치매 같은을 앓게 됐다면 봐주는 걸로요. 건망증이요? 그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COMMENT : 0 TRACKBACK : 0

카테고리

곽재선의 窓

날짜

2018.11.06 11:34

열여덟번째 窓

 

"있을 때 잘해"

 

KG 가족사는 한 해에 몇 차례씩 크고 작은 가족사 모임을 갖습니다. 산행도 하고 트레킹도 합니다. 평소 별로 교류가 없는 다른 가족사 직원과 만나 함께 야외활동을 하는 자리지요. 한 회사에서 3∼4명의 지원자가 참석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간 가족사 모임에 참석한 직원들을 살펴보니 퍽 재미있는 현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딜 가든 같은 회사 직원들끼리 똘똘 뭉쳐다니는 건데요. 그렇다면 이들이 과연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이냐? 절대로 아니랍니다. 눈인사 정도 하던 사이, 아니면 그날 처음 봤다는 사이도 꽤 있고요.

 

명색이 가족사끼리이업종교류를 하자는 건데 이작태를 그냥 보고 넘길 수가 없지요. 끼리끼리를 해체해 다른 가족사 직원들끼리 묶어버렸습니다. 숙제도 내줬습니다. “파트너의신상털기를 해라. 사는 동네가 어디고, 전화번호가 뭐고, 무슨 업무를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조리 알아내라.” 그런데 숙제를 다 했는지 안 했는지, 산을 타면서 또 길을 걸으면서 어느 사이인가 또 슬금슬금 자기 회사 짝꿍 옆에 가 있더군요.

 

몇 차례 시도를 해도 늘 같은 현상이 반복됩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지요. 사실 다른 가족사 직원과 파트너 맺기를 해야 한다고 내가 우기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누구나 다 아는 그런 이유입니다. 매일 하던 자신의 업무를 떠나 다른 업종에 근무하는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어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서로에게서 새로운 인사이트를 주고 또 받아보자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누구도 잘 알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한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나 선후배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를 직접 겪어보라는 겁니다. 같은 울타리라지만 그간 알게 모르게 부서 간 앙금이 쌓일 수 있고 동료 간 오해가 생겼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조차 더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는이보다 더 반가울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거 아닙니까.

 

,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대충 드러난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있을 때 잘해란 겁니다. 소중한 건 잃어버리기 전까진 잘 모르는 거니까요. 굳이 부모와 가족 얘기만이 아닙니다. 사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고요. 일도, 직장도 마찬가지지요. 어쩌다 실직이라도 하게 됐다면 며칠 지나지 않아 뼈저리게 와닿을 겁니다. “정말 나에게 귀한 일이고 소중한 직장이었구나.”

 

내 나이대 친구들이 하나둘 은퇴전선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형편이 넉넉지 않은 친구도 있고, 몸이 불편한 친구도 있습니다. 반대로부자소리를 듣는 재산가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한결같은 소망이 뭘까요. “일을 더 했으면 좋겠다입니다. 이어지는 탄식도 있지요. “그때 그렇게 한 번 해볼 걸….” 아직도 해보고 싶은 일이 많이 남아 있더란 얘깁니다.

 

부모든 친구든 가족이든 동료든 또 일이든, 바로 지금 눈앞에 있을 때 잘하는 게 중요합니다. 없어지고 사라졌을 때의 감정을 어찌 미리 예측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새 수많은 시행착오로 터득하지 않았나요. 반드시 경험한 뒤에야 후회하게 된다는 것을. 현인이든 선배든 웃어른이든 그들이 일러준 대로만 따를 수 있다면, 굳이 경험하지 않고도 잘할 수 있다면, 인생이 훨씬 풍요로워질 텐데 말이지요.

 

가족사 모임 뒤에 부수적으로 생긴 또 하나의 긍정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 같은 회사 짝꿍만 졸졸 따라다니던 이들은 어찌됐을까에 관한 것인데요. 산행을 마치고 트레킹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한 이들은 꽤 친한 사이가 됐답니다. 아마 한 대중가요의 가사가 가진 심오한 뜻을 비로소 깨달은 게 아닐까요.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해 흔들리지 말고. 가까이 있을 때 붙잡지 그랬어.…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그러고 보니 나부터 반성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지요. 있을 때 잘합시다.”

 

 

COMMENT : 0 TRACKBACK : 0

카테고리

곽재선의 窓

날짜

2018.11.06 11:30

열일곱번째 窓

 

"살면서 언제 가장 기뻤나요"

 

‘내가 가장 기뻤던 순간이 언제였나.’

살면서 한 번쯤은 해봤을 질문입니다. 내가 볼 땐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때는 보통 둘 중 하나인 경우 같습니다. 사는 게 힘들어서 자꾸만아 옛날이여!’를 외치고 있을 때가 그렇고요. 아니면 어떤 일이 계기가 돼 주마등처럼 필름을 돌려보게 되는 때가 그럴 겁니다. 게다가 다들 사는 게 힘들고 팍팍하다고 하는 시절 아닌가요. 부쩍 자주 좋았던 순간, 기뻤던 순간을 되돌아보게 될 겁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잘 돌아가던 회상필름이 뚝뚝 끊기는 난처한 경우가 생기더란 겁니다. 소소한 에피소드는 많은데가장 기뻤던 때’ ‘제일 좋았던 때가 언제인지 딱히 말할 게 마땅치 않더란 거지요.

 

로또 복권에 1등 당첨을 맞아본 적이 없으니 까무라칠 만큼의 극한희열도 없고, 장기간 불경기다 보니보너스 몇 백 프로같은 대박재미도 없이 살고 있더란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건 누구나 다 한 번씩 겪는 일일 텐데요. 예를 들어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던 날,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한 날, 첫 아이가 태어난 날 등등.

 

물론 그런 일상의 날들이 정말 좋았던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닌 경우도 많을 거란 게 내 판단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마지못해 찾아낸그저 그런 일일 수 있다는 얘깁니다. 기쁨이니 슬픔이니 하는 건 오로지 단 한 사람, 나 자신만이 느끼는 감정이니까요. 나는 남들이 별로라고 고개를 가로젓는 일에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반면 당신은 누구라도 엄청 기뻐할 일에 시큰둥할 수도 있지요.

 

사실제일 기쁘다는 감정은 크기를 잴 수 있는 것도, 무게를 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측정을 못할 우리가 아니지요. 최소한 나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원하고 얼마나 바라고 얼마나 힘들었나를 보면 되니까요.

 

사법고시에 합격한 두 청년이 있었답니다. 한 청년은 준비를 시작하고 첫 시도에 척 붙었습니다. 다른 한 청년은 10여년이 걸린 진짜 ‘78였습니다. 한 청년은 집안형편도 괜찮은 데다가 머리까지 좋아 크게 어렵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청년은 생활고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다가 노력만큼 성과도 잘 안 나와 오랜 시간 고생을 했다고 하고요.

 

, 두 사람 중 누가 합격의 기쁨을 더 크게 느꼈겠습니까. 당연히 78기의 청년이 아니었을까요. 누구보다 애절하고 누구보다 힘들게 얻어냈을 테니까요. 합격이란 결과는 똑같았을지언정 합격으로 얻은 감정의 농도는 완전히 달랐을 겁니다.

 

어디 사법고시뿐이겠습니까. 갖고 싶은 물건도 힘들게 구해야 귀한 것이 되고, 사랑도 어렵게 쟁취해야 값진 게 되는 법입니다. 결국 기쁨의 크기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게 아닌가 합니다. ‘가장 기뻤던순간에 답을 얻으려면 그만큼에 해당하는가장 간절한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겁니다. 적당히 기쁘려면 적당히 하면 되고, 미친듯이 기쁘려면 미친듯이 달려들어야 하는 거지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겁니다. “죽을 만큼 기쁘고 싶은가. 그러면 죽을 만큼 힘들어라!” 그렇다고 인생에 채찍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당근도 있어야지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고되고 힘들다고? 절망하지 마라. 그 대가도 커질 테니까.” 여기에 반전도 있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편해서 좋은가. 앞으로 얻을 것도 별로일 거다.”

 

좀 가혹하다 싶습니까. 어쩌겠습니까. 내가 볼 땐 그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정답인 듯합니다.

 

                                                             

 

COMMENT : 0 TRACKBACK : 0

카테고리

곽재선의 窓

날짜

2018.11.06 11:24

열여섯번째 窓

 

"당신인생은 누구의 것 입니까"

 

“네 인생은 누구 거냐?” 혹시 친하게 지내는 동료나 친구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대답은 거의 비슷할 겁니다. “내 인생? 당연히 내 거지!” 그리고 여기서 끝나지 않겠지요. “뭐 그런 걸 다 물어. 어디 아픈 거 아냐?”

 

그런데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질문 하나를 더 던진다고 합시다. “그러면 인생은 뭐냐?” 아마 여기에는 쉽게 대답을 못할 겁니다. 그저 저 친구가 왜 저러나 멀뚱히 바라만 보겠지요.

 

질문이 잘못된 건 아닐 겁니다. 아마 익숙하지 않아서겠지요. 어찌 보면 살면서 한 번도 제대로 고민해보지 않은 주제일 테니까요. 그래서 딱히 뭐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겁니다.

 

인생이란 한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의 전부입니다. 그 사람의 시간, 생각, 행동, , 여건, 환경 그 모두입니다. 어느 일부만도, 어떤 단계만도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그 전부를 누리는 당사자는 정작 그것을 모르는 듯합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쓰고 있는 시간이 내 인생이란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누구를 위한 것이든, 아니면 정말 하고 싶지 않은 것이든 그것은 내 인생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겠지요. “내 인생의 주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시간이라 하더라도, 내가 하고 있는 이 일, 내가 쓰고 있는 이 시간을 바로 내 것으로 만들면 된다.”

 

뮤지컬맨 오브 라만차를 대표하는 유명한 노래가 있습니다. 주인공 돈키호테가 부르는이룰 수 없는 꿈이란 곡입니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비록 남들에게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처지였지만 그는 인생을 아는 친구였습니다. 일과 시간과 꿈까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위해 매진할 줄 알았으니까요.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참 보잘 것 없다고 합니다. 거대한 우주에서 지구는 그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작디작은 지구, 그 한 귀퉁이에 박혀 살고 있더라도 내가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방법은 있습니다.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영화마션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홀로 뚝 떨어진 화성에서 주인공은 영원히 우주고아로 남을지도 모를 위기를 잘 극복합니다. 그것도 아주 유쾌하게요. 물을 만들고 감자를 키우고. 인류 최초로화성 감자재배란 막중한 과업을 수행하면서도 깨알유머를 잊지 않습니다. “화성이 내 식물학자적 능력을 두려워하게 될 거예요.”

 

우주의 주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찮은 티끌만도 못한 존재가 될 것인가. 두 갈래의 길에서 어느 쪽으로 들어설지를 결정하는 건 결국 자신의 생각과 행동입니다.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는 일부터겠지요. “당신 인생은 누구의 것입니까?”

 

                                                      

 

COMMENT : 0 TRACKBACK : 0

카테고리

곽재선의 窓

날짜

2018.11.06 11:21

열다섯번째 窓

 

"당신은 리더입니까 보스입니까"

 

혹시깍두기라고 아십니까. 조직폭력배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지요. 대체로 이들의 머리가 짧고 얼굴이 큰 게 그 모양이 딱 깍두기 같다고 해서 붙은 별칭입니다. 이들에게는 일정한 행동패턴이 있습니다. 윽박지르든 두들겨 패든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키고야 마는 거지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명령을 따르라는 거지요. 누구의 명령일까요. 물론보스의 명령입니다.

 

문득 궁금해지지요. 보스를 리더라고 봐도 되는 건가? 만약 아니라면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 조직의 대장 혹은 수장이라고 본다면 크게 다를 건 없을 것 같은데.

 

리더와 보스를 사전식으로 정의해보면 이렇습니다. 리더는 어떤 조직이나 단체를이끌어가는사람입니다. 보스는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권한을 갖는사람이지요. 언뜻 비슷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여기에 내 생각을 좀더 붙여볼까요.

 

리더와 보스, 둘을 구분하는 큰 기준이 있습니다. ‘고민참여라는 겁니다. 어떤 단체나 조직에 대해 고민이 많은 사람이라면 리더입니다. 별 고민이 없는 사람이 보스고요. 또 어떤 사안에 대해 생각이든 수행이든 구성원을 참여시키려는 사람은 리더입니다. 아예 구성원을 배제시킨다면 보스라고 할 수 있지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리더는내가 틀릴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반면 보스는내가 절대로 틀릴 수 없다고 단정하지요. 또 리더는누가 어떤 제안을 하는지살피려 합니다. 반면 보스는누가 나에게 덤비는지를 살피지요

 

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결정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결정권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의 기본권이니까요. 만약 인간이 자기결정권을 잃는다면 동물과 다를 게 없어지는 거지요. 바로 이 자기결정권을 두고 리더와 보스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겁니다. 리더라면 상대의 자기결정권을 지켜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보스는 상대의 자기결정권을 누르고 빼앗으려 듭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보스가 적절치 않다고 보는 겁니다. 리더가 필요한, 더 나은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구성원을 보스보다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덕목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자기결정권을 빼앗기면 누구도 행복하지 않으니까요. 일의 결과가 잘되고 못되고의 문제가 아닌 겁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리더만 있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일의 효율성만을 놓고 볼 때는 보스가 단연가성비갑입니다. 단칼에 끊어버리고 확실하게 결정하고, 한마디로 화끈하니까요. 보스는보스보스 아님으로 나뉘지만 리더는좋은 리더나쁜 리더를 기본으로따뜻한’ ‘냉철한’ ‘고지식한등등 종류도 다양합니다. 그러니 리더의 일처리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요. 절차도 복잡하고요. 하지만 보스는 일사천리입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리더를 바라는 건 어렵게 함께 나아가는 과정의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마치 민주주의처럼 말이지요. 아주 불편하고 거추장스럽더라도요. 우리가 세상을 사는 목적은 효율이 아니고 행복이니까요.

 

어떻습니까. 이쯤에서 한번 물어봐야겠지요. 당신은 리더입니까 보스입니까. 아니 리더가 되고 싶습니까 보스가 되고 싶습니까. 나도 솔직히 고백해볼까요. 가끔은 나도 보스가 되고 싶습니다.

 

                                                 

 

COMMENT : 0 TRACKBACK : 0

카테고리

곽재선의 窓

날짜

2018.11.06 11:18

열네번째 窓

 

"반성의 본질"

 

‘립서비스’란 말이 있습니다. 상대에게 베푸는말뿐인 호의란 뜻입니다. 가식적인 칭찬이나 진정성 없는 빈말을 꼬집을 때 그렇게 빗대곤 하지요. 그렇다고 해도 무턱대고 나쁘게만 보지 않은 건 상대의 기분을 맞추고 분위기를시키는 데 이만큼 충직한 봉사도 없으니까요. 다들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립서비스에도 격이 있는 법입니다. ‘최하급이라면 그냥 영혼 없는 입놀림에 불과하다는 거지요. 아니 아주 고약한 서비스가 돼버립니다.

 

내가 아는 한 회장님은 립서비스가 정말 탁월합니다. 시간차 공격에도 능할 뿐만 아니라 날리는 족족 정확히 꽂히기까지 하지요. 그런데 그 신공에 가까운 장기가 삐끗하는 뼈아픈 기록을 세우게 됐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회장님이 골프를 치러 나섰던 날이었답니다. 동반자가 티샷을 탁 치고 나자마자 회장님은 늘 하던 대로나이스샷!”을 외쳤다는 거지요. 거기까진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샷이 문제였습니다. 빗맞은 공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캐디도 미처 못 본 상태였고요. 그러자 다들나이스샷!”을 외친 회장님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공이 어디로 날아갔나요?” 그런데 그 회장님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자백을 하더랍니다. “사실 나도 못 봤습니다.”

 

그날 이후 회장님의 립서비스는 최하급으로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모든 말이영혼 없는 입놀림으로 간주돼 아무도 응수조차 안하는, 그야말로완전한립서비스가 돼버린 거지요.

 

그런데 가만히 따지고 보면 듣기 좋은 칭찬만 가지고 왈가불가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보통 잘못을 하거나 죄를 지었을 때 하는 반성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드는 거지요. ‘내가 뭔가 잘못했구나싶을 때 사람은 용서를 구하고 또 뉘우칩니다. 그런데 그 반성이 순도 몇 %짜리 진정성일까. 그 속을 들여다보니 몇 %는커녕 대부분 상황을 무마하려는 면피용처럼 보이더란 거지요. 그저 책임을 피하려는 방편으로 사과하고 반성하는 것 같더란 얘깁니다.

 

우스갯소리를 한번 해볼까요.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의 반성은 보통 두 부류로 나뉜답니다. “잘못했다, 하지만 나는 죄가 없다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누명을 썼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죄수들은 한결같이내가 지금 교도소에 있긴 하지만 잘못한 건 아니고 뭔가 큰 착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면피로 하는 반성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반성은진심을 다 담아해야 합니다. 왜 굳이 그래야 하느냐고요? 영혼이 깃든 반성만이 발전이나 개선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반성을 했다고 하는데도 똑같은 잘못이 반복되고 있다면 그저 영혼 없는 반성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는미안합니다나이스!’를 반복합니다. 하지만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란 말을 하려면 정말 부끄러운 반성이 앞서야 합니다. 칭찬도 마찬가집니다. 상대에 대한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진 다음에야 비로소 꺼낼 수 있는 말인 겁니다. 반성과 칭찬은 립서비스로 끝내버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진정성이 실종돼 가는 세상, 우린 지금 그저 입으로만 그 세상을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COMMENT : 0 TRACKBACK : 0

카테고리

곽재선의 窓

날짜

2018.11.06 11:16

열세번째 窓

 

"감정은 빼내고 따집시다"

 

 지금이야 난리가 날 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전 학창시절에는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쯤은 선생님께 주어진 공권력인체벌이 거의 일상이었습니다. 단체기합이란 명목아래 좀 심하게 두들겨 맞는 날도 있었지요. 진짜 잘못을 했을 때도 있지만, 간혹 억울하게 맞은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조차 그저 한때의 추억일 뿐 마음에 오래 담아두는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된 나중에 두고두고 술자리 안줏감으로 삼을 만큼만이었지요.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깊은 상처가 되는 체벌이 있답니다. 바로 감정이 잔뜩 실린 체벌을 당했을 때랍니다. 잘못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구나 싶을 정도로 황당하게 맞았다면 평생 가슴에서 꾹꾹 박히는 트라우마가 된다는 겁니다.

 

누군가가 뭔가 잘못을 했을 때 그래서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할 때 정말 조심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감정입니다. 그때 그 순간의 기분에 따른 감정이 판단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는 겁니다. 말 그대로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가 되어야 하는 거지요.

 

물론 잘못을 하는 쪽뿐만 아니라 잘못을 따져야 하는 쪽도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찌 칼 같은 이성만 들이댈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감정은 최대한, 아니 전부를 빼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감정이 섞이면 상황을 읽어내는 분별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진심이 무너지고 객관성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판단이 흐려지고 확신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감정을 잔뜩 싣고 누군가의 잘잘못을 가리자고 나서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는 거지요. “난 절대로 감정적이지 않아.”

과연 그럴까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 그 자신은 잘 압니다. 아니 사실은 당하는 사람도 알고,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도 압니다. 이미 그가 감정에 팍팍 실린 상태로 일을 그르치고 있는 중이란 것을.

 

얼마 전 친구의 딸이 결혼을 앞두고 신랑 될 사람과 함께 주례를 부탁하러 찾아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이것부터 확인했습니다. “왜 결혼을 해야 하는지 이성적으로 충분히 판단했나? 아직 늦지 않았다. 결혼은 그 다음에 결정해라.”

 

서로 좋아하면 됐다고요? 살다 보면 싫어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돈이 많다고요? 요즘 같은 불확실성이 높은 세상에서는 거지 되는 일도 아주 쉽습니다. 능력이 뛰어나다고요? 지금까지는 그랬나 보지요.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누가 장담한답니까.  지금 당신이 느끼고 판단한 것이 혹시 감정이 앞선 어설픈 판단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지난해 한국사회의 이혼율이 33.7%를 찍었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남녀간에 결혼의 본질과 의무감을 생각하고 결정했다면 지금보다는 이혼율이 줄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이를 훈육할 때나 회사 일을 처리할 때, 나아가 경제에도 정치에도 법에도 감정이 들어가면 바로 문제가 생깁니다. 감정도 사랑에 눈멀게 하는 콩깍지와 다르지 않아 이성을 덮씌우면 제대로 사리분별이 안 되는 거지요. 특히 누군가를 단죄할 때나 심판할 땐 감정이 절대로 끼어들면 안 됩니다. 그건 또 다른 죄입니다.

 

감정이 개입한 판단은 이미 틀린 판단입니다.

 

, 지금부터 곰곰이 한번 생각해봅시다. 가정에서 부모나 아이를 대하는 행동에, 직장에서 상사나 부하를 대하는 말투에 감정이 실렸는지 아닌지. 그러고 보니 나도 완전히 거기서 자유롭지는 못한 듯합니다. 이제부턴 감정을 걸러내는 일에 좀더 신중해야겠다 싶습니다.

 

 

 

COMMENT : 0 TRACKBACK : 0

카테고리

곽재선의 窓

날짜

2018.11.06 11:14

열두번째 窓

 

"당신의 나이는 몇 살 입니까?"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하다가 귀국한 한 여성분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 이야기 중 재미있는 게 한 가지 있었는데요. ‘내가 진짜 한국에 와 있구나라는 느낌이 확 들 때가 있답니다. 주로 이런 질문을 받을 때라고 하네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라거나어째, 결혼은 하셨나?” 같은. 어쩌다가 한두 번 마주친 것이 전부인 상대가 덥석 그런 질문을 할 때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지요.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외국에서는 잘 모르는 상대에게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결혼은 했느냐?’라고 묻는 일은대형사건이랍니다. 굉장히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또 엄청난 실례를 범할 각오가 아니라면 작정하고 캐내야 하는개인기밀이니까요.

 

어쨌든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간 덕분에 모처럼나이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도대체 나이가 뭐길래 함부로 묻고 답하기 곤란한천기누설이 돼버린 건가. 그냥이름이 뭡니까처럼 편하게 묻고 답하면 안 되는 건가.

 

흔히나이하면 세상은 오로지 한 가지 잣대만 들이댑니다. 지금 연도에서 태어난 연도를 빼는 계산법. 사실 나는 양머리 세듯 햇수로만 나이를 세는 이런 방식에는 좀 비딱한 편입니다. 나름 계산하기 편리할지는 몰라도 별로 공평한 것은 아니니까요. ‘나이혹은나이 먹는 일이란 게 누구에게나 똑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나이에는 세 가지가 맞물려 있다고 봅니다. ‘행정적 나이육체적 나이정신적 나이’.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나이가 바로행정적 나이입니다. 출생신고를 하는 순간 낙인처럼등록돼 평생 따라다니는 그거지요. 그런데 이행정적 나이라는 건 사람을 배려했다기보다 서류를 배려한 것입니다. 순전히 행정적인 편의에 의해 만들어졌으니까요.

 

알다시피 신체적 기준으로 볼 때 개개인의 노쇠함은 이런행정적 나이와는 많이 다릅니다. 예순 살이 돼도 40대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고요, 반대로 마흔 살에도 60∼70대의 골골체력인 사람이 적지 않지요. 실제로 세상과 하직하는 날을 가장 정밀하게 알려주는 건행정적 나이가 아닙니다. 우리 몸이 얼마나 건강한가를 알려주는육체적 나이지요.

 

그렇다면정신적 나이는 어떻습니까. 앞의 두 가지와는 또 다릅니다. 호기심·열정·도전 같은젊은 키워드가 많고 적음에 따라 달라지는 나이니까요. 젊은이는 새로운 것에 아주 관심이 많지요. 뭐든 정열적으로 덤벼들고 또 과감하게 저지릅니다. 반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로운 것에는 시큰둥합니다. 두려워하게 되고요. 만사가 다 귀찮다고도 하지요.

 

, 어떤가요. 우리에게 가장 필요 없는 나이가행정적 나이인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 어설픈 나이에 갇혀 스스로 주눅 들고 도전을 안 하고 생각을 멈추고 있습니다.

‘행정적 나이의 많고 적음은 절대로 우릴 지배할 수 없습니다. 고작 서류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그까짓 숫자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요.

 

젊어지고 싶습니까. 운동하고 도전해보십시오. 열정을 갖고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느껴 보세요. 진짜 평생을 젊게 살 수 있습니다.

 

 

                                                       

 

 

COMMENT : 0 TRACKBACK : 0

카테고리

곽재선의 窓

날짜

2018.11.06 11:12

위로가기